농촌진흥회와 이들 ‘중견인물’을 통해 일제는 조선의 촌락까지 정치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농촌진흥운동은 조선 농촌경제의 몰락을 배경으로 계획된 일종의 경제운동이었다. 그렇기에 그 이면에 숨어있는 목적성을 제외한다면 물산장려운동과 일면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1930년대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경제적 저항과, 농촌 계몽운동, 형평 운동과 같은 사회적 저항이 있다. 또한 일본의 가자유 정책으로 인해 최소한도의 언론 자유가 주어지면서 생겨난 일간지와 잡지를 중심으로 문화적 저항이 일어났다.
문화적 저항과 함께 식민지 시대의 지성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교육, 환경, 소비자, 통일, 청소년, 지역공동체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시민운동 과제들을 적극 추진해 왔고, 현재 전국 50여개 도시에 10만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YMCA, 1999; 춘천YMCA, 1999나).
1949년 2월 21일 강원도 최초의 민간사회단체로 출범하여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춘천YMCA
시대)와 민족주의자
한때 민족운동에 종사하던 변절 친일파들은 그 성향과 변절 시기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명망을 갖은 엘리트로서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정책에 매몰되어 식민지체제 안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 개량적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의 개념과 상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민족 고유의 상대성과 주체성을 올바로 세워나가는 것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근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제하 문화운동에서 주장했던 논리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일제하 문화운동에
일제는 우리나라 점령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으로 궁핍한 경제 상태를 유지시켜 제국주의적 약탈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토지 조사 사업'은 농촌에 있어서의 봉건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1910년 3월부터 1918년 10월, 약 9년이라는 시간과 2000만엔의 비용을 들
시대, 일제강점기)의 경제발전
시대별로 토지조사사업(1910년대)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30년대 전반),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급속한 공업화(1930년대 후반∼1940년대 전반)등이 행해졌다.
일제 식민지지배의 커다란 특징의 하나로서 '토지소유관계의 철저한 개혁'을 들었는데, 이는 농촌을 근본
농촌진증운동’, 즉 자력갱생으로 표현된 우가키의 농산어촌 진흥운동 및 정신작흥, 사회 교화운동 등이 총독부에 의해 대대적으로 추진되자, 급격하게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된다. 정성희, 「1920년대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내용 분석 : 교수요목부터 6차교육과정까지」, 성균관대학
사회경제 사학
1) 식민사관의 정체성 극복에 가장 유리
2) 한국사의 발전을 체계화하여 역사적 보편성을 강조하려는 역사 연구 방법
3)『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의 전 과정은, 지리적인 조건․인종적인 골상․문화 형태의
외형적 특징 등 다소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외관상 특수성이 다른
사회조직에 관계하고 있었다. 여기에 기폭 장치를 마련한 것이 동경 유학생 신분의 김기진이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포된 신흥사회과학에 빠져든 다음 특히 계급주의를 지향한 『씨뿌리는 사람』을 탐닉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정신적인 동조자를 찾아 나서서 먼저 배재고보의 동창생인 박영희,